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 술자리를 가졌다. 근데 친구들중 꼭 한명씩 있는 조기에 만취해 버리는 그런 친구가 있다. 이 친구..설정이 아니라 완전 정신을 잃는다. 거의 매번 그러는걸 보면 아마도 술을 해독하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선천적으로 술이 안맞는것 같은데, 아이러니 하게 술을 참 좋아한다. 보통 술자리가 시작되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그자리에 앉아서 잠을 자기 시작하고는 몇분후에는 그자리에서 꼬꾸라져서 머리를 바닥에 박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진다. 이친구와 반대로 강철의 간을 갖고 태어난 친구도 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친구가 취하거나 술을 그만 먹자고 하는걸 본적이 없다. 체력도 좋아서 다음날 아침까지 먹기도 한다.
98년도? 97년부터 인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전까진 특별한 구역을 제외하곤 저녁 12시면 모든 술집이 영업을 마쳤다. 물론 알게 모르게 영업하는 집도 많았지만, 거리에 술집간판들은 모두 꺼졌고, 포장마차를 제외하곤 술마실 곳이 없었던 때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도 일찍 끊겼고, 심야버스 라는 것이 운행할때였다. 12시넘어서 돌아다니면 경찰관들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을때고, 골목 여기저기 몇군데 있던 편의점만이 환하게 세상을 비출때 였다.
이당시에 '삐끼'라 하여 술집이 많은 번화가 에는 호객꾼들이 참 많았다. 츄리닝을 입고 있는 젊은 친구들부터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 아저씨들까지 술취해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술한잔 더 하셔야죠..애들 끝내주는데.."하며 다가 왔다. 12시 넘으면 어차피 불법영업이기 때문에 좀더 하드한 불법영업을 하는곳들이었다. 흔히들 삐끼집이라 부르던 룸싸롱 같은곳이었고 웨이터 부터 접대부까지 미성년자들이 태반이었다. 당시엔 공공연하게 이런술집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술취해서 바가지 쓴 다음에 혼자 항의해봤자 건장한 청년(?)들이 돈 다받아낸후 밖으로 쫒아내던 시절이다.
소주방도 한참 유행했던 때인데 소주방들도 12시 넘어서 몰래 영업을 했다. 간판불 끄고, 문잠그고....가게 사장님만 가게 앞에 나가서, 알고 오는 손님들 몰래 뒷문으로 데리고 오곤 했다. 그땐 핸드폰도 귀했던 시절이라 파나소닉에서 나온 무선전화기를 무전기 처럼 사용했었다. 레몬소주, 체리소주등의 칵테일 소주가 대세였고, 이런곳 역시 어차피 불법이니 미성년자들을 손님으로 받아 주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친구들도 가보았는데 손님의 대부분이 우리또래였다.
이땐 또 업소주인들과 파출소 경찰분들..구청 위생과 직원분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시절이었던것 같다. 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에도 종종 전화가 왔는데..이를 테면 이런식이다. " 어..나 누군데..오늘 단속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해라.." 그리고 술집 주인들끼리도 굉장히 연대가 잘되어 있었다. 한가게가 단속 맞으면 바로 전화가 온다. "야..뒷골목 지금 단속 떳으니까 음악끄고 당분간 문열지마.." 그런 전화를 받으면 마치 비상연락망 처럼 우리도 다른 가게에 전파를 했다. 가게 손님으론 가끔식 어디어디 경찰서 누구누구 분들이 오셨으며, 어디 구청분도 오시곤 했다. 물론 그분들이 계산하는건 한번도 못봤다.
내가 일하던 가게의 사장님이 제일 무서워했던건 경찰도..위생과도..아닌 비가 내리면 동네를 돌아다니던 꽃모자 였다. 꽃모자를 쓰고 흰양복의 뱀가죽구두를 신고 다니던 분이 있었는데 업소사장님들은 하나같이 그를 '날씨 또라이'라고 했다. 비만 오면 나타나서 또라이 짓을 한다고....처음 그를 본것은 너무나 위풍당당한 자세로 입구를 들어와 테이블에 앉아서 큰소리로 "어이~~여기!!" 라고 부를때였다.
꽃모자 : "야~ 사장 어디갔냐? 사장좀 오라고 해봐"
본인 : (오랜경험으로 사장님 친구나 선배겠다 싶어서) "사장님 밖에 계시는데요..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꽃모자 : "그냥 올라오라 그래"
본인 :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장님이 올라오셨는데 사장님이 "누가 날 찾아?" 해서 내가 저분이요..하며 가르켰더니..."저 새끼가 왜 여기 와있어? 저거 내쫒아버려!!" 엥? 뭐지? 친구분이 아닌가?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
암튼 우여곡절 끝에 쫒아내긴 했다. 같이 일하는 형이랑 엄청 고생하면서....
근데 문제는 그때 부터였다. 12시만 넘으면 길가에서 소리 빽빽 지르며 "xx주점은 무슨 빽으로 새벽까지 장사하냐~~!!" 하면서 돌아댕긴 거였다. 사장님이 불러서 협박(?)도 해보고 회유도 해봤는데 안통한단다..그러더니 비오던 어느날 사장님이 몸소 그 꽃모자를 데리고 가게를 들어오는것 아닌가?
사장님 : "야~앞으로 이친구 오면 맥주3병이랑 노래 3곡 부르게 해줘"
우리들 : "네...."
사장님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꽃모자랑 쇼부를 치셨단다. 가게 올때마다 맥주 3병 줄테니 먹고 가라고, 그리고 다신 밖에서 소리치지 말라고...근데 꽃모자가 옵션을 걸었단다..노래도 3곡 하게 해주슈..
당시 우리가게는 그 동네 단란주점중 가장 장사가 잘되는 가게 였다. 강동구를 납품하는 주류회사에서 우리가게가 술이 가장많이 나간다고 하였다. 그럴수 밖에 없던이유는 우선 여느단란주점과 달리 접대부를 쓰지 않았으며, 맥주도 따르면 2잔도 안나오는게 짜증난다며 사장님은 그 근처에서 유일하게 같은가격에 3홉자리를 판매했고, 노래비는 받지 않았다. 하여 토요일이나 피크때는 줄서서 들어올때도 많았다. 그런데 꼭 이 꽃모자는 손님이 많을때 와서 청중을 앞에 두고 노래 3곡을 부르고 갔다. 나이가 대충봐도 50은 넘었는데 당시 최신곡 이었던 재결합한 소방차의 G카페를 부르곤 했다. 내 청년시절 기억중 가장 특이한 인물이었다. 꽃모자....그분이 아직도 길동전화국 앞을 어슬렁 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네..ㅎㅎ
그때 오시던 손님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던 부류는 옆에 있던 대학병원의 의사분들이었다. 주로 인턴/레지던트 들이 왔으니 항상 맥주랑 과일만 기본으로 시켜 먹으며 팁이란건 생각도 못해봤다. 그리고 많이 배워서 였는지 뭐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웨이터들을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심했다. 그래도 당시 응급실 담당이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참 따스했다. 우리가 다쳐서 응급실에 가면 그냥 치료하고 보내주시고, 옆에 소주방에서 만나도 격이 없게 형동생 하면서 술잔을 같이 했다. 좋은 말도 많이 해주셔서 한참 방황기에 있던 내겐 큰 도움이 되었던 분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꼭 오시던 사거리에 국민은행분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은 술도 좋아하지만 매너도 좋았고, 정말 형동생처럼 지냈다. 좋은 얘기도 많이 해주고, 어리고 서빙한다고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주었다. 나의 어린시절 극과 극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경험을 하고, 역시나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지금까지 온것 같다. 고등학교 중퇴에서 끝날뻔 했던 인생이 대졸로 바뀌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로부터 10년후.....거리마다 네온싸인이 밤새도록 번쩍거린다. 돈만 있으면 술마실곳은 수도 없이 많다. 종류도 다양하다. 치킨집부터 갈비집, 횟집, 노래방, 단란주점, 나이트 클럽, 포장마차도 이젠 기업형이다.
술때문에 일어나는 범죄나 시비도 잦아졌다.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어가게 된것이다. 하지만, 이로인해 발전한 산업이 있다. 바로 대리운전....예전엔 대리운전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대리운전 기사도 구하기 힘들었고, 보통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택시기사분께 부탁을 했었다. 강남의 유명한 술집을 제외하곤 대리운전기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때이다.
택시도 심야승객이 많아졌다. 택시가 영업이 예전만큼 안된다고 하지만, 실제 술집이 많은 번화가 주위엔 장거리로 택시잡는 승객들이 많다. 물론 만취손님들이니 기사분들은 좀 불안해 하더라.
대한민국의 밤이 길어졌다. 인터넷의 활성화와 게임방의 범람으로 청소년이나 20대들도 하룻밤 정도 잠안자고 버티는건 쉬워졌다. 예전엔 24시간 사우나에서 보냈던 것이 이젠 찜질방이라는 대규모 오락(?)시설이 생겼다. 살기가 많이 좋아졌다. 돈만 있으면 하루종일 심심하진 않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 게임방에서 몇날 며칠을 보내는 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좀 씁쓸한건 왜일까? 예전엔 스타크래프트도..리니지도 없었지만 심심하지 않았는데..친구들과 놀이터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만 해도 재밌던 때가 있었는데....동네마다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하고 오징어를 하고 컴컴해지면 술래잡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같은 동네 아이들은 모두 친구였으며 왕따도 없었고, 분무기 하나씩 갖고 나와서 물싸움도 하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하고 놀던 그때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것 같아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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