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신설 외고들의 입시 문제 유출 사건으로 세간이 한바탕 시끄럽다. 또 연세대학교의 학장 부인 사건에서 시작된 편입학 부정 수사도 유명 사립대학들로 확대될 조짐이다. 해당 사건으로 피해를 입거나 수상 대상이 된 학생들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자신들이 희생되는 것은 부당하다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항변에 대해 또 다시 온정주의를 들이대 유야무야하는 것은 절대로 반대이다. 잘난 부모를 둔 덕은 봐도 되고, 못된 부모를 둔 탓은 보면 안 된다는 식의 온정주의는 이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특히 위의 사건들에서 만큼은 '자식이 무슨 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외고 문제 유출로 불합격한 학생들의 경우, 학생들 스스로가 입시 학원의 부정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사건을 폭로한 용감한 중학생의 모습은 모른 척하고 있던 나머지 동급생들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편입 부정의 경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이미 성인이다. 부모가 자식의 편입을 위해 뒷돈을 주거가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은 공범일 뿐이며,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모를 팔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남자 주인공 강인구는 폭력조직의 중간 보스이다. 그의 아내는 조직폭력배인 남편을 늘 못마땅해 하면서 그만두라고 한다. 그의 딸은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글까지 일기에 남긴다. 그런데 자기의 남편과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싫어하고 역겨워 하면서도, 결국 그 남편이자 아버지가 핏값과 죄값으로 번 돈으로 좋은 집을 사고 유학을 가며 우아한 세계에 편입된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는 영화이고 그래서 물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내와 자식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는 아버지와 남편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억울한 희생으로 지탱되는 '우아한 세계'에 주목하고 싶을 것이다. 밖에서는 온갖 악한 짓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힘 없고 평범하고 온순한 가장으로 살아가며 우아한 세계를 이끄는 한 남자의 이중적인 모습에 주목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꿈꾸는 '우아한 세계'의 허구성과 방법적 사악함에 대해 주목해 본다. 우아한 세계에 살기 위한 목적을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군상들이 빠진 도덕적 혼돈과 무책임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어떤 위대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수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양심과 도덕과 책임의 문제에서 생각해 본다면 수단과 과정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두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은 애시당초 언어도단이다. 개처럼 번 돈은 이미 개의 돈이지 정승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처럼 얻은 부와 권력으로 우아한 세계의 정승처럼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죄악이고 위선일 뿐임을 영화 우아한 세계는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잘못된 수단으로 이룬 우아한 세계는 사실은 추악한 세계일 뿐이다. 외고 문제 유출 사건으로 합격 취소 처분을 받은 어느 학생은, 방송 인터뷰에서 '저희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저 합격만을 위해 최선을 다 한 것 뿐이예요. 어른들의 그런 행동이 정말이지 치사하고 더러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어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럽고 치사한 일인 줄 알고 있으니, 그런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성과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자신들은 몰랐으니 불합격 처분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연좌제를 헌법으로 금하고 있다. 과거 수 천 년 동안 연좌제라는 올가미는 우리 사회의 합리적 발전을 가로막는 적이었다. 천민 신분의 어머니를 둔 허균과 홍길동은 자신의 능력과는 관계 없이 출세할 수도 호부호형(呼父呼兄)할 수도 없었다. 대역죄인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였으며, 그 후손들의 출세길도 모두 막혔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작가 이문열은 평생의 삶을 자기검열 속에 가두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연좌제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악습이 되었다. 범죄자나 범법자 가족을 두었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이 같이 처벌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금해야 할 것은 법적인 연좌제일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불행은 사람들이 '마음의 연좌' 혹은 '반성의 연좌'까지 모두 연좌제 금지의 대상이라 착각하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과실의 연좌'를 통해 죄로 얻어진 결실에 대해 죄의식 없이 누리고 차지하려 하는 추악함이 발생하고 있다. 대다수 복일매국노들의 후손들은 왜 비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들의 부모나 조상이 복일매국노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가족이 저지른 복일매국 행위에 대해 마음으로의 '죄값의 연좌'를 그들이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더러운 재물로 호의호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혼란과 도덕성 망각, 책임감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책임의 연좌'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몇 년 간 전 국민의 절반이 부동산 투기의 행렬에 동참하였었다. 대통령과 정부에서 투기는 범죄이고 조금만 참으면 집값이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준법과 양심을 거부하고 투기꾼이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손들의 돈지랄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 때부터 그 투기 동참자들은 갑자기 피해자가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되어 정부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카드 대란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너도 나도 카드로 신용 대출을 받고 대책 없이 소비하다가 문제가 터지자, 그제야 카드 발급을 장려한 정부가 신용불량자 양산의 주범이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 것이 일반 국민들이었다. 공약 없는 정치, 흠집내기와 막무가내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결국 그러한 정치와 정치인을 만들어 낸 괴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하고 싶고, 양심과 정의가 무너져 버린 대한민국의 위기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책임부터 따져보아야 옳지 않은가? 질서와 룰이 사라진 부패 공화국 대한민국, 꿈과 희망이 사라진 대한민국, 건전한 정책의 토론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당신은 국가과 민족에 대한 근심으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건강하고 정직한 대한민국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슬픈 일이지만 그런 국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슬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투표율과 득표율을 감안해 보았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얻은 지지는 30% 전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율은 꾸준히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5년 간 나는 많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위선을 목도하였다. 정작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은 자들이, 혹은 투표조차 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이 노무현을 선출한 것을 후회한다는 거짓말과 유언비어를 터뜨리는 행위를 나는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진정성을 갖고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지난 5년 간 비판적 지지자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을 바랐고 책임감을 견지해 왔다. 부동산 투기와 주식(펀드) 광풍,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 도박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한탕을 노리던 자들, 또는 실제로 한탕을 건진 자들이 경제와 도덕의 위기를 떠들고 서민의 몰락을 말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의 뻔뻔함과 위선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 구석구석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 '우아한' 구석은 별로 없고, 썩지 않은 구석이 없더란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아는 것은 숙지(熟知)와 무지(無知)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앎이 현실의 세계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는 책임(責任)과 무책임(無責任)의 영역에 속한다. 숙지가 책임으로 이어지고 무지가 무책임으로 이어진다는 도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배웠다. 정의와 양심에 대해 책임을 가진 무지인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정의와 양심을 갖춘 숙지인에게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묻고 실천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싸움은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아니며, 진보와 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진정한 대립각은 책임감(양심) 있는 자들과 책임감(양심) 없는 자들의 싸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숙지하고 있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부추겨 거짓 선동을 일삼으며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있다. 각 개개인의 사정을 떠나, 55세 이상의 중, 장년 층 상당수가 정치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보수우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무지와 무책임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며 더 젊은 세대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집스런 무지와 비뚤어진 무책임으로 인해 그들의 자식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또 불안한 미래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자들의 기만과 사기와 착취와 부패는 유지되고 있으며 단죄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제 좌파나 진보라는 말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진정성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주인 되는 세상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낡은 구호와 헛된 망상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의 민주노동당의 무책임한 선동은 귀족노동자나 조폭노조 같은 또 다른 계층을 탄생시켰을 뿐이며 양극화 해소나 서민 생활 개선,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원론적인 대안 제시 조차 못하였다. 요컨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나 진보는 희생이나 양보, 책임과 양심을 대변하는 말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게을러도 잘 살수 있는 권리'를 외치는 단어로 변질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나 좌파를 자부하는 세력들 역시 보수나 우파를 자부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이 사회의 혼탁과 부패에 대해 '죄악의 연좌'를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 사회의 싸움은 아마도 책임과 무책임, 즉 양심과 비양심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물론 숙지하고 책임을 갖춘 사람이라면 진보나 좌파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수나 우파가 되어도 사회에는 해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 대선 정국이 어지럽다. 그런데 정작 후보 자신은 그 사건과 논란에서 한 발 비켜나 민생 장정이라는 우아한 세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후보 자신이 정말로 우아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면, 추잡한 세계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은 그곳에 발을 담은 적이 없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강인구가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더라도 그가 폭력조직에 몸 담고 타인의 핏값으로 부를 얻었다는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와 도덕성에 대해서는 침묵과 변명으로 일관하며 오직 우아한 세계만을 말하는 후보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도덕성을 상실하고 법을 지키지 않은 자가 대통령이 되어 이룬 성장과 발전은 결코 우아한 세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한번 생각하기 > ★웰빙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산곶매 이야기 (0) | 2007.11.25 |
---|---|
할머니....고맙습니다. (0) | 2007.11.24 |
[스크랩] 몸속 중금속 배출하는 영양 가득 채소 Best 10 (0) | 2007.11.09 |
[스크랩]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국수 한 그릇 (0) | 2007.02.21 |
오래살게 해주는 10가지 음식 (0) | 2007.01.30 |